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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ause of Winn-Dixie 소설 수업 시작_블루밍 온라인 북클럽 FL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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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ria
댓글 0건 조회 23회 작성일 25-03-14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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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굴로그를 소설수업 오래 봐온 동료님들은 내가 (의외로) 다양한 수업 방식을 구사하지 않는 교사라는 걸 알고 계실 듯. 이건 능력의 문제이기도, 취향의 문제이기도 한데 나는 새로운 방식에 도전하는 것보다 “왜 가르치지?” “어떤 방향으로 해석하지?”를 생각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내가 잘하는 것, 즐거워하는 것이 이쪽이다보니 자꾸 이 방향으로 강화되는 경향이 있음. 호호.​재미있는 건 나와 취향이 비슷한 동료님들이 은근히 많다는 점이다. 호응해주시는 분들과 답글로 나누는 대화가 즐겁다. 취향이 비슷한 사람과 가깝게 지내는 건 아주 큰 재미니까. 내게 블로그는 취향 공동체가 모인 사랑방과 같다. 소듕해.​소설과 비소설 읽는 이유에 대한 각각의 생각을 기록해둔 적이 있는데, 이 고민은 직업 생활을 하는 동안 내내 떠올리게 될 문제이므로 최근 업데이트 된 바를 추기하려 한다. ​(언제나처럼) 누워서 웹툰을 보다가 꽤 부끄러워지는 경험을 했다. ​채식을 하는 주인공이 정말 말 그대로...포스트에 이어지는 글이다.​가르치는 사람이다보니 “이걸 왜 읽혀야 하지?”라는...​이 시대에 필요한 소설 교육의 목표는 “너의 구림을 확인해라.”인 편이 명확한 지향을 갖지 않나 여기게 됐다.“이런 사람이 있어.”를 보여주는 것으로 수업이 끝나는 것은, 기계적인 공감, 동정, 연민을 양산할 뿐이다. 그것으로는 무엇도 좋아질 수 없다. 독하게 말하면 소설을 통해 가슴 아픈 사연들을 보여주며 고귀한 가치를 말하는 일에 나 스스로 도취되어 있었던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여긴다.‘소설 읽는 이유’의 주요 내용아이들이 “안타깝다.”, “세상 왜 이래.”, “나는 저런 사람이 안 돼야지.”의 감정에 머무는 것은, (안타깝게도) 세상이 달라지는 일에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여긴다. 마음 아파하는 사람만 만들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사람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난다. 슬퍼하는 마음이 무력하다는 것이 아니다. 움직이는 1인이 제시하는 방향에 관심을 갖고 고개를 돌려보는 사람은 슬퍼하는 이들일테니까. ​청소년 입장에서 장애 인식 개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미미하다. 청원 정도? 하지만 ‘공부’는 이 친구들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큰 범위로 몸을 움직이는 일이다. 특정한 사안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일에 영향을 미치려면 공감/연민(→소설)과 동시에, 더 알고 싶다는 마음(→비문학 도서)의 조합이 필요하다. ‘비소설 읽는 이유’의 주요 내용​평론집을 부러 찾아 소설수업 읽는 편이다. 최근작을 가르칠 때 교사 혼자 운전대를 잡고 부아앙 내달려 만든 해석으로만 수업하는 걸 경계하기 때문이다. 글, 특히 문학은 독자가 (오독하지 않았다면) 직접 이해한 결과가 폭넓게 인정되지만, 가르치는 입장에서 제시하는 해석은 독자 개인이 가진 생각보다 폭넓고 깊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내가 애들 앞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문학의 멋짐에 힘이 실릴 것 같다. 그래서 평론을 자주 읽는다. ​근래에 읽은 것 중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었던 책을 소개하자면.​특히 밑줄을 많이 그어가며 읽은 건 강동호, 강지희, 김건형, 이은지 평론가의 글이다. 그 중에서도 표제작인 강동호 평론가의 ;에서 머리를 띵 맞은 듯한 충격을 여러 번 받았다. 수업할 때 진짜 각잡고 준비해야겠다 싶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2019년에 ;을 두고 소설 수업을 했다. 학생들은 3주 동안 독서 일지와 서평도 쓰고 모둠 토의도 하고 구술평가도 치르면서 작품을 뜯어 읽었다. '장강명은 진짜배기 천재다.'《산 자들》 마지막 장을 덮으며 한 생각. 소재도, 문장도, 주제도...​당시 수업에서 내가 무게둔 바는 빈곤이었다. (여담. 불과 2년 전이지만 당시와 비교하면 내가 소설교육을 바라보는 시선이 상당히 달라졌다. 2019년의 나는 소설을 읽고 아이들이 주인공을 향해 안타까운 마음을 품게 하는 일에 상당히 공을 들였고, 수업 시간에 “안타깝지? 그러니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거야.”라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학생들을 ‘연민하는 독자’로 만드는 수업을 상당히 경계한다. 연민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고, 등장인물을 향해 안타까움의 마음을 갖는 순간 아이들이 그들과 자신을 분리해버린단 한계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랜기간 블로그 운영을 하다보니 내가 과거에 쓴 글을 종종 다시 읽게 되는데, 지금과 너무 달라서 “내가 썼다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면 민망하기도 하고, 인간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희망을 발견하기도 하고, 아주 다양한 감정이 이는데 말입니다(웃음) 여튼, 이웃님들도 과거의 제가 했던 말들을 적당히 걸러 들어주세요. 하찮은 소리 자주 하더라고요, 흑흑.) ​다시 돌아와서, 띵- 했던 내용은 ;을 세월호 모티프의 작품으로 읽어낸 평론가의 해석이었다.​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에 실린 소설들은 세월호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것은 소설집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들이 세월호 참사 이후에 발표되었다는 소설수업 물리적 사실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의 글쓰기가 참사의 직간접적인 영향 어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다름 아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슬픔 속에서 사는 사람들(「입동」, 「노찬성과 에반」,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대상에 대한 믿음을 빼앗긴 불안과 직면해야만 하는 인물들(「건너편」, 「풍경의 쓸모」, 「가리는 손」) 모두가 세월호 이후에 태어났음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준다. 이들은 “없던 일이 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일은 나중에 어떻게 되나”(「노찬성과 에반」, p.45)라는 치명적인 물음을 스스로에게 제시하며, 무효화될 수 없는 파국이 일으킨 일상의 파장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의 삶을 응시하는 중이다. 소설의 전반적 분위기는 한층 무겁고 우울하며, 비극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운』과 달리 『바깥은 여름』이 비관주의의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김애란이 재난 앞에서도 부서지지 않는 삶을 조명하며, 점차 죄의식의 감옥으로부터 바깥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느린 발걸음이 타인의 고통 앞에 서 있는 작가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응답일지도 모른다고 믿기 시작했다. (30-31쪽)​“없던 일이 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일은 나중에 어떻게 되나”라는 말이 아주 큰 의미를 갖는 문장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수업의 중심에 두지 않았다. 나는 초점을 이미 찬성이와 에반의 참혹한 경험을 알리는 일에 두고 있었으므로 그 문장을 쥐고 해석하는 일이 오히려 흐름을 해친다고 여겼다. (부끄럽지만) 솔직히 ;을 세월호와 연관지어 이해할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조금만 검색을 해봐도 알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마치 눈가면을 쓴 경주마 같았달까? 강조하고 싶은 지점 하나만 보고 우다다 달려갔다. 물론 소설 수업을 할 때 특정 지점에 무게를 실어 전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가, 어디까지 달려가는가’를 바르게+정확히+섬세하게 설정했어야 한다는 말이다.​-근래 책 추천할 일이 있으면 《연중무휴의 사랑》을 권하고 다니는데, 이 책에서도 과거 나의 소설 수업을 떠올리며 뒷목을 잡게 만드는 장면을 만났다.​집에 온 엄마는 작은 식빵이 귀엽다고, 요즘엔 참 별게 다 있다고 했다.요즘 누가 이런 걸 사 먹어, 좀 더 돈 주고 다른 거 소설수업 먹지. 엄마가 여기저기 안 다녀서 그렇지 번화가 지하철역만 지나가도 천지야, 이런 거.왜, 이만하면 괜찮지 뭘 그래.뭐가 괜찮아. 눈 좀 높여, 그냥 그런 가게는 도태되는 거야.그 무렵 나는 냉소에 소질이 있었다. 구조의 탓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사회에서, 엄마도 나도 날마다 쉬지 않고 일해도 떠내려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았고 우리도 그럴까봐 늘 겁을 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나는 창피당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한 개인의 노력이나 그 와중에 제 가치를 믿어보려는 개인의 욕망을 무심코 혐오했다. 뻔한 결과에도 마음을 다하는 사람들을 경멸했고, 어차피 안 될 이유를 자꾸 찾거나 그냥 망할 이유를 힘주어 말하는 식으로 내 기대를 숨겼다. 빵 맛에 무언가 특별한 게 있기를, 누구라도 열심히 일하면 생계를 꾸릴 수 있기를, 그리해 그들이 밤에 푹 자기를 바라는 그런 기대란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던 것이다. 그런 기대는 사람을 부풀렸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정성을 쏟게 만들었고 잠을 쫓거나 삶을 곪아가게 했다. 이미 넘치게 고된 개인을 몰아붙였고 그 곁의 내 마음을 자꾸 아프게 하다못해 잠자리를 뒤척이게 만들었다. (37쪽)​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 혹은 20대 청년들을 바라 보며 “신인류다”라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다. 기성세대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방책들을 이 친구들에게 그대로 소개하는 일이 의미가 있을까, 라는 의문을 스스로를 향해 자주 던지곤 한다.이 친구들은 기존 세대들이 막연한 공포로 감각했던 미래에 대한 불안들을 실체화, 현실화된 버전으로 직접 겪어내는 세대이다. 정말 한치 앞도 전망할 수가 없잖아. 그래서 이들을 향해 “미래에 대한 무조건적 낙관을 갖게 하는 일이 정말 도움이 될까?”라는 물음을 재차 품게 되는 것이다. (내가 운좋은 사람이라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 있지만) “버티다보면 결국 괜찮아져.”라는 말은 정말로 존버하면 뭐가 되긴 했었던 우리 세대까지만 유효한 문장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허무주의적, 비관적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자는 의미는 아니다. “세상이 얼마나 비정한지 알아? 그러니까 지금 준비 열심히 하란 말이야.”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이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는 희망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 세대에서 기능한 가르침이 이 친구들에게 그대로 작동할 거라 예상하는 일은 너무 소설수업 안일하다. 세상이 달라졌다고. ​건물주가 되는 법, 코인으로 돈 버는 법을 알려줄 수는 없겠지만(내가 알고 싶네.) 암울한 세상 속에서 쥐고 살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힌트는 줄 수 있다. 하지만 전처럼 아이들에게 제시되는 내용이 무조건적 연대, 무조건적 타인지향인 것은 충분치 않다고 본다. 세상을 살아낼 때(=버텨낼 때) 타인지향과 연대는 아주 큰 힘을 발휘한다. 이 둘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제기하는 문제의 방점은 무조건적에 찍혀 있다. “창피 당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서 타인을 경멸하고 혐오하는 법을 택해야 하는 세대에게 “사람이니까 당연히!”라는 이유를 근거로 내세우는 일은 기만적이다. 그런 이유는 우리 세대에서 유의미한 거고요. ​+) 엄혹한 시기를 통과할 때 타인을 지향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근거를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에서 찾아 소개한 적이 있었죵.수업 준비할 때 어떤 책을 읽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을 즐겨 읽는다. 애들 ...​그도 그럴 것이 이 챕터에서 다루는 책 『사피엔스』, 『팩트 풀니스』, 『라틴어 수업』, 『공부머리 독서법』은 모두 세상사의 공리주의적 측면을 강조하여 독자의 이타심과 공감능력을 유도한다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별다른 조건 없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지식서라는 단 하나의 기준만으로 선택했음에도 이런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와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앞서 말한 4권의 책은 각각 상상력을 키우고 언어를 활용해야 하는 이유, 세상을 냉정하고 합리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로 공리주의 를 꼽는다. 나와 타인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타인의 행복이 나와 직결되는 지점을 설명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결국은 정의롭거나 선량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복과 안위를 위해 공리를 택해야 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게 공리를 추구하기 위해 택할 수 있는 방법이 ‘언어’나 ‘공부’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282-283쪽)​-(당시엔 꽤 만족스러웠지만) 과거의 내 소설 수업을 납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작품 속에서 ‘타인만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때로 그것은 동정받아야 하는 상을 설정함으로써 (내가 의도한 결과가 아니었음에도) 타인을 대상화시키기도 했고, 혹은 사회 현상에만 집중함으로써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경험과 감각, 감정들을 뭉개버렸다. ​이 글이 아주아주 의식의 흐름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체계를 잡아 소개하는 소설수업 일에 실패해버렸지만(흑흑) 《연중무휴의 사랑》에서 내가 찔끔했던 장면은 사실 폐업하는 빵집을 보며 느낀 소상공인 자녀의 소회가 담긴 내용이었다. ​그를 지나쳐 집으로 향하는 날이면 나는 엄마와 엄마의 가게를 떠올렸다. 평범하고 작은 동네 가게. 빚지지 않겠답시고 엄마는 일주일 내내 새벽까지 일하다 아침에야 잠이 들었고, 쑤시는 몸을 뒤척이고 끙끙거리다 오후면 일어나 다시 일을 나갔다. 창피하지 않으려고 그런다고 했다. 어디 가서 빚지면 안 돼. 자신의 한계 지점에서 인내하는 게 유일한 위안이라도 되는 것처럼 엄마는 저 말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자주 힘들어해서, 나느 꼬박꼬박 융통성 없이 사는 엄마에게 대한민국이야말로 수없는 밤을 빚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울컥해서는 빚을 싫어하는 저 양반이야말로 내게 죄책감을 빚졌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음식을 하느라 종일 서서 일하는 엄마의 발에는 자꾸 굳은살이 박였다. 굳은살은 여린 살을 파먹어서 엄마는 자주 그 살을 아파했다. 새벽녘 화장실을 갈 때면 안방 문틈을 타고 서투르게 발바닥이고 발톱이고 뭔가를 파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러 한계까지 자신을 밀어붙이는 듯 보이는 사람들이 버티기 위해 무얼 하는지를 알려면 그들의 새벽을 보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타인이 자는 시간에 잠들지 못하고, 나는 내 마음이 저리다는 이유로 잠들지 못하는 이를 자주 미워했다.그리고 그날 한낮의 캄캄한 가게 앞에서 타인의 빚을 읽어내리며, 나는 엄마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를, 새벽의 빈 거리를 서성이던 빵집 사장이 되뇌던 게 무엇이었는지를 졸지에 알아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가난은 죄구나…. 사회는 없는 사람에게 열심히 일해도 회생 불가한 수치와 죄책감을 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빵집 사장의 딸로 보이는 학생이 부루퉁한 얼굴로 빈 가게를 지키곤 하던 기억이 스쳤다. 나는 그 애가 문에 붙어 있고 끼워져 있던 무엇도 보지 않았길 간절히 바랐다. (35-36쪽)​-2019년에 한 수업을 아주 좋아한다.​까다롭겠다 싶은 글을 읽을 땐 애들을 찾아가 몇 퍼센트나 이해 돼?라고 묻는다. 너무 어렵다 ...소설 후반부를 공부하는 날. 극심한 경쟁, 본사의 횡포 속에서 살 길을 찾는 가맹점주들의 움직임이 나타난...;를 배우는 마지막 시간. 소설 전체 내용을 정리하는 동시에 '문학'이...​하지만 이제와 생각하면 이 수업은 현대사회의 문제를 폭로한다는, 그리고 문학의 가치를 소설수업 일깨운다는 ‘대의’에 가려져 그 진창같은 상황을 버텨내는 ‘개인’을 조망하는 일에 실패했다. ​그렇다고 개인을 바라보는 일이 그를 동정하고 연민하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니다. 개개의 존재에게 집중을 한다는 것은 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피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물의 행동과 말에 담긴 의미를 분석하고, 그와 나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폐업하는 빵집 사장을 바라보며 노동하는 나의 부모를 떠올리고, 없는 사람에게 수치와 죄책감을 아무렇지도 않게 고지하는 세상에 화를 내며, 노력하는 사람을 향해 경멸과 혐오의 눈길을 보내는 방식으로 자신을 덜 비참하게 만들려 애써왔던 자신을 상기하는 ‘나’처럼. ​-그렇다면 우리는 소설 교육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사회비판도 아니고 특정한 대상을 연민하는 것도 아니라면. ​운 좋게도, 나는 앞서 소개한 두 글의 말미에서 (1990년대도, 2000년대도, 2010년대도 아닌) 2020년대에 희망을 말하는 방법에 대한 힌트들을 찾을 수 있었다.​길을 걸으며 가로수의 뿌리를 감각한다. 어떤 뿌리는 벽돌을 있는 힘껏 밀어내며 저 나름대로 애쓰고 있다. 지나는 길목을 울퉁불퉁하게 만드는 뿌리들은 한계 속에서 자라면서도 타인의 걸음을 변화시킨다. 새싹이 저렇게 되기까지의 의지란 성가신 동시에 경이로웠다. 뿌리내리는 일엔 요령 같은 게 없어서, 오래된 나무의 두꺼운 핏줄을 볼 때마다 나는 나무의 그늘 아래서 이 땅이 얼마나 단단하고 척박한가를, 그걸 마주하는 뿌리의 생명력을 가늠해보곤 했다. 이상하게도 그러다 보면 조금의 촌스러움과 열악함, 조금의 하찮음과 뻔함 같은 걸 냉소 없이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견뎌야 할 것만 같았고, 또 그러다가도 내가 도대체 뭘 감내한다는 건지 몹시 창피해졌고….불 꺼진 가게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날도 그랬다. 해가 좁은 폭으로 느릿느릿 지던, 너무 밝고 너무 뜨겁고 너무 명백했던 여름에 마침내 드러나게 되는 것들. 선명하게 드러나는 무언가를 보이지 않게끔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나는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며 무더위에 전기를 끊는 일을, 빵이나 빵집 사장을 부풀린 게 무엇인지를, 그렇게 뿌리내리려던 삶을, 묵묵히 빵을 먹던 엄마를, 밤을 서성이던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명치를 찡겨오는 낡은 브라가 따가워 땀띠가 날 거 같았다. (《연중무휴의 사랑》 38쪽)​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탄식과 소설수업 안타까움을 표한 이웃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우리를 피하고 수군거렸다.” (「입동」, P.36) 우리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다. 인간은 무례하고, 이기적이며, 타인의 상처를 관람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위선적인 존재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잠시 슬퍼하고 기억과 애도를 다짐하지만, 곧 그것을 망각하고 차별과 혐오로 가득한 세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비극은 반복될 것이고, 그러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그런데, 인간은 불가해하다. 때로 인간은 마치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이,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칠흑과 같은 압도적인 어둠의 한 가운데에서도, 생의 불꽃을 꺼드리지 않고, 느리게나마 앞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가기도 한다. 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선을 실천하며, 그 빛에 의거하여 암흑 속 주변을 살피고 자발적으로 연대를 모색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 증명하듯이, 그저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통해 자신이 패배하지 않았음을 강렬하게 증명할 것이다. [중략]희망이 용기의 산물이라는 말은 역설적이게도 선에 대한 상상력이 실천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회의와 냉소의 시간을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있는 한, 다시 말해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파국이 펼쳐지더라도 희망을 향한 우리들의 용기는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바깥은 여름』의 인물들이 바로 그 증인들이다. (《2020년 제21회 젊은평론가상 수상 작품집》 41쪽)​아니, 완전히 다른 글인데 결국 희망을 말하며 끝을 맺는다는게 너무나 울컥하잖아! 게다가 그 희망은회의와 냉소의 시간을 감당해야만 오는 것이라구! (흥분)​소설교육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그리고 말해야 하는 현재형의 희망은 분명 과거와 달라야 한다는 점에 대해 생각하는 지금이다. 일단 떠오른 바들을 두서없이 써본 것이라, 읽으시는 분들께 내용이 어떻게 전달될런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지만- 현재형의 고민이므로 도무지 정리할 수가 없네유(무책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기 전에 남겨두고 싶었다. ​답이 없다. 말끔히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하고. 하지만 힘을 주어 말할 수 있는 바는, 지금의 청소년에게 유의미한 문학수업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주제와 목표를 갖고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조금이나마 우리가 이 친구들에게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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