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되는 법] 등단, 투고 등 소설가 되는 방법 총정리 - 정지우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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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소설가되는법 날짜가 잡히고 나는 매일 책만 읽는다.불안할 땐 책만 쭉쭉읽고 회복할 땐 온종일 일기를 쓰는 이상적이지만 남들에겐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 패턴을 가진 나는 한 권의 책을 쭉~읽는건 내겐 16작 드라마를 정주행하는 일처럼 따분하고 고된 일이어서 한 번에 3-4권의 소설, 1-2권의 비소설을 저렇게 쌓아놓고 계속 번갈아가며 읽는다. 그치만 내겐 읽다 포기한 소설, 보다 외면한 영화는 없다. ...저 많은 책들을 정신없이 왔다갔다 읽는게 아니고 시간표 정해놓고 한 책 당, 하루 한 시간씩 읽는데 이렇게 읽으면 저 두꺼운 소설책들도 1주일이면 4권을 끝마치게된다. 하루4시간을 본다.책 한권들고 일주일을 질질끌게되는 지겨움보다 여러권을 읽으면 훨씬 효율이 높다.나는 읽으면서 ????태그 붙이고????손글씨로 필사하고????그걸 다시 컴퓨터에 타이핑해서 ????블로그에 리뷰를 쓰고????게다가 이미 읽은 책을 몇 번을 읽기에책 한권을 소비하는데 큰 성의와 마음을 쓴다. 그래서 작가들을 향한 마음이 애뜻하다....요즘은 읽기쉬운 일본소설들에 빠져있다. 일본 소설을 읽을땐 일본밴드 안전지대의 노래를, 영어 원서를 읽을땐 찰리푸스나 해리스타일즈의 노래를 틀어놓아 읽고있는 문화와 듣는 문화가 동떨어지지 않도록 한다.귀로는 일본음악 꽂고 눈으로는 영어를 읽으니 중간중간에 정신이 끊기고 멘붕이오는 경험을 했다. 이상하고 재밌는 경험이었다. 뇌속에 일본어와 영어가 둥둥 떠다녔다. 독서할땐 연주음악이 좋을듯하다.시작한 책은 많은데 끝까지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써도 이거보다는 낫겠다.” 악평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책은 읽었는데 소설가에 대해 아예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소설을 왜 읽어야해? 라며 시청각적 자극에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것, 미디어에 노예가 된 이들도 있다. 이건 다 각자 그 사람들의 마음이다. 어떤게 옳은 것이고 어떤게 나쁜 것이고 할 것도 없다. 나는 영화도 유튜브도 넷플릭스도 좋고 소설책도 아주 좋아한다. 독서에 아주 어릴적에 길들여진 나는 책을 읽기에 앞서 큰 호흡을 들이켜야하는 수고가 필요없다. 책을 들고 조용한 혼자의 시간을 보내는 건 내겐 씻는 일이나 숨쉬는 일만큼 자연스럽다. 그래서 나에게는 글을 쓰는 사람들을 대하는 특별한 마음가짐이 있고 그것에 대해 정확하게 내 스스로 결론 지어놓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아주 어릴 때 꿈 말고, 10세가 되어 바깥세상에 대한 개념이 생기고, 12세가 되어 자아의 기둥이 생기고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각이 생겼을 때, 나의 꿈은 소설가가 되는 것이었다. 소설을 많이 읽었고 그 독서수준이 왠만한 성인의 수준을 넘어 닥치는대로 읽고 감탄하고 하던 시절, 나의 꿈은 내가 쓴 허구로 세상을 감동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회가 이제 막 호주에 도착해 I 가 주어이고 am 이 동사이고 a girl 이 주격보어라는 것 조차 몰르는데 혼자 영어를 공부해서 학교 생활을 해야하는 불쌍한 이민 1.5세에게 소설가되는법 생길리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노력했었다. 중1나이에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주관하는 글쓰기대회엔 무조건 참가를 했다. 우표값만 쓰면 되는 노력이었기에 가능했다. 편지쓰기 대회, 수필쓰기 대회, 시 쓰기 대회, 참가하는 족족 나는 대상이나 금상을 탔다. 장려상을 타는 사람의 마음따위는 잘 배우지 못했다. 아버지가 타자기를 사줬고,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긴긴밤 타자소리를 타타타탁 주르르륵 땡 타타타탁 타타타탁 주르르륵 땡 내가며 글을 쓰고 또 썼다. 모든 일엔 때가 있다고, 그 누구도 나를 말린 적이 없는데 나는 소설가가 될 시도를 하지 않았다.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로 역이민을 와 영어강사가 되어 20년을 넘게 매일 영어를 국어보다 더 많이 쓰며 살았다. 그래도 숨통은 트이며 산 이유가 내 직업자체가 텍스트를 읽고 쓰고 분석하는 일이며 실력이 되는 아이들하고는 영어 소설을 읽고 확장하는 일이었어서 소설을 좋아하고 설명충인 내게 그럭저럭 만족스러워서 영어쌤일이 천직이라고 착각하며 살 정도였다. 내가 책읽기와 일기쓰기를 얼마나 좋아하냐면, 언제나 맘이 그런 것에 가있다. 밥을 하다가도 빨리 밥해먹고 치우고 아까 읽던 에쿠니 가오리 읽어야지. 병원에 갈 땐 기다리는 동안 우울하지 않게 집중이 되는 다자이 오사무를 가져가야지. 한 달에 한 두번은 이연수, 정이현, 한은형작가의 신작이 나오지 않았나 검색을 해본다. 모두 알람을 해두어서 때가 되면 올 텐데도 검색을 해야 속이 편하고 불멸의 여성작가들-루시 모드 몽고메리, 루이자 메리 알콧, 프렌시스 호그슨 버넷, 루이스 로리- 의 클래식 작품들은 리미티드 에디션 양장책이 나오면 꼭 2권씩 소장을 해야하고 그것들을 계속 돌려봐도 하루 24시간이 모자를 정도로 읽는다. 나는 다독이 아닌 정독을 하고 모든 클래식을 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작가만 찾아 읽고, 읽은 책을 읽고 또 읽는다. 하던 일을 빨리 마치고 책을 읽어야지, 일기를 써야지, 블로그를 써야지, 이럴 정도로 나는 글과 친하다. 이렇게 된 이유로는 외로운 과거사가 있다. 나는 E의 탈을 쓴 I이다. 소위 I라고 하면 내성적이어서 사람들앞에서 고개를 못 드는 사람으로 오해를 하는데, 우리 내성적인 사람들은 자신감이 없는게 아니라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스스로 충전하는 타입이고 사람들과 있을 때 방전이 된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시켜줘서 나서야할 때는, 가령 학교때는 발표나 반장의 일, 직장때는 미팅이나 강의, 시원하게 질러주고 나머지 시간은 나 스스로 보내기를 좋아했다. 아주 어릴때부터 그래왔는데 그때 친해진 물건들이 만화책과 소설책과 노트와 펜이었다. 어릴때부터 탄탄하게 쉬지 않고 읽어온 만화와 소설책들은 이제 나와 대화가 가능한 주위사람이 없을 정도로 혼자 아는게 많다. 그래서 외롭기도하고, 학생들과 소설을 읽고 대화할 수 있어서 그 시간만큼은 신나게 떠들기도 소설가되는법 한다. 어쨌든 나는 성장환경과 성격적으로 책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살았다. 내가 빠진 것이 게임이나 망상이 아닌것이 다행이다. 나는 책을 그것의 커버를 보고 판단한다. 어떤 사람들은 Never judge a book by its cover.라고 말하며 현자인 척을 하는데, 나는 책은 그 커버를 보고, 사람들은 그들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고 그게 편하다. 책 커버엔 작가의 이름이 있고, 작가와 에디터가 엄선한 제목이 있고, 액자 값이 아깝지 않을 일러스트가 있다. 책 한권을 소유하는 것은 작가의 혼과 출판사의 성의와 그림작가의 작품을 모두 가지는 대단한 호사다. 근데 그 모든 것을 말해주는 커버를 보고 판단하지 말라니... 책 속의 내용은 각자 읽는 방식과 독해력과 받아들이는 경험치가 다르다. 나는 책의 커버를 보고 책을 판단하는 것을 좋아하고 커버를 보며 가졌던 기대감에 부흥하는 내용이길 바랄 뿐이다. 책의 내용이 맘에 들지 않았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는 모든 소설을 좋아하고 고마워한다. 단, 커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 적은 많다. 소설은 작가입장에서나 독자입장에서나 책임감이 있어야 한 권을 끝낼 수 있다. 나는 한 번 시작한 책은 끝까지 본다. 읽다가 중간에 멈춘 책은 없고 끝까지 다 읽는 행동을 일종의 독자의 예의이자 그 책을 골라 구매한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읽다가 ‘재미없다’며 던져버린 책은 여태껏없다. 애초에 좋은 책을 잘 선별해 고르기도 하지만 그저 커버가 예뻐서 궁금해서 골라온 소설도 다 재밌게 봤다. 내 머리속엔 재미없는 소설로 받아들여질 책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말리지 않았는데, 글을 잘쓰는 소질과 오래 앉아있을 수 있는 성실함을 가져놓고 자신의 선택으로 소설가가 되지 않은 나로써는 소설을 쓴다는 작업은 매우 매우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가 재미없다고 던져버리는 사람을 보면 그 순간은 한심해 보인다. 지는 뭘 해봤다고... 소설가인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건내준 재미있는 소설을 (BUTTER, 유즈키 아사코, 2021) 재미없다고 몇 장 읽기도 않고 내게 돌려주길래 “500장이나 넘는 소설을 끝마쳐서 출판을 성공한 것이 경이로운거야. 재미가 있냐없냐는 다 읽은 독자만이 논할 수 있는 문제라구! 이 사람의 생각과 고민의 시간들이 압축되어 한 권의 책이 되어 번역작가가 번역해서 내 손에 들어있다는 그 경이로움에 재미? 재미를 따져? ” 라고 타박을 했고 내 남편은 그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1년동안 쓰던 소설을 드디어 끝마쳐 한 달안에 출판을 해버렸다. 나는 소설의 첫 장을 열 때, 초콜릿 박스를 여는 기쁨따위에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을 갖고 시작한다. ‘어려웠을 텐데 끝내줘서 감사합니다. 또 책 한 권을 내줘서 감사합니다. 소설가되는법 잘 읽어 볼게요.’라는 마음을 가진다. 그리고 나를 실망시켰던 소설은 세상에 없다. 어떤 책은 심심해서 재미있고, 어떤 책은 끔찍해서 재미있고, 어떤 책은 유쾌해서 재미있다. 심심해도 내 스타일이 아니어도 그것은 책을 다 읽은 순간까지 논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 읽고 나면 내 나름의 요약, 정리, 확장을 하고 생각에 잠겨 여운을 느끼다보니 지금까지 재미없던 소설은 한 권도 없다. 나야말로 내가 읽은 그 책을 재미있다 혹은 재미없다 이야기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독자일텐데 나는 그걸 따질 마음이 없다. 나는 모든 소설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고 믿고 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믿었다. 중1때 읽었던 -지금은 절판된 - “아름다운 너”라는 한국소설을 읽고 소설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 어떤 마력을 부릴 수 있는지 알게 됐다. 그 후 읽게된 소설중 감동적이었던 소설은 작가에 대한 검색을 꼭 해봤다. 작가의 삶과 그가 둔 삶의 가치에 관해 어렴풋히 역사책을 통해 알게되면 그 책의 메세지가 더 깊이 전달되었다. C.S. Lewis 의 기독교 신앙을 알고나면 나니아 연대기라는 소설 시리즈가 주는 구원의 힘과 기쁨을 더 감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루이자 메리 알콧의 아버지를 향한 짝사랑과 죽은 동생을 향한 동경과 연민을 알고 작은 아씨들을 읽어보면 그녀가 쓴 네 자매의 삶은 아름다운 스토리가 아닌 절규로 보인다. 목회자이자 교수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제발 나를 따라 죽어줘. 죽음의 길에 혼자 가는 것은 두려워.”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알콧 그녀는 아버지와 자신이 믿은 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것을 느꼈을 테고 이제야 아버지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도 자신의 남은 인생을 거부하고 며칠 후 아버지를 따라 죽었다. 그녀의 책 내용 작은 아씨들 1~4권은 전부 현실이자 전부 허상이다. 나는 이처럼 작가는 자기가 살아본 세상에서 벗어나 이야기를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행이라곤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소설가 쥴스 베른은 그가 남긴 수 많은 공상 소설에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 이야기들이 직접적이거나 사실적이지는 않지만 소설가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거쳐 만들어온 세계관이 존재하고, 본인이 잘 알던 인지하고 있지 못하던 소리내고자 하는 세상을 향한 메세지가 분명히 있다. 그 메세지가 하나인 소설가도 여러개인 소설가도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소설이 좋고 소설가가 존경스럽고 사랑스럽다. 자신의 세계관과 인생사, 배우고 느낀점, 하고자 하는 말을 정리해서 하나의 스토리에 포장해 선물하는 보물상자이지 않겠는가. 나도 언제라 나의 뚜렷한 세계가 생기고 나의 메세지가 생기면 혼자서라도 읽을 소설을 쓰고 싶다. 지금 삶의 시점에서, 나의 유일한 꿈 두 가지중 하나는 내가 소설가가 되는 것이다. 되지 소설가되는법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꿈은 다 이룰 수 있는게 아니니까. 내 꿈이 꼭 이뤄져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12년전 소개팅으로 내 남편을 만났을 때, 큰 키와 건조하게 생긴 유럽식 외모에도 반했지만 꿈이 소설가라는 말에 나는 뻑갔다. 40대나이에 1위 글로벌 대기업을 다니는 잘나가는 엘리트 주제에 꿈이 소설가라는 말을 참 잘도 한다고 생각했다. 그 꿈이 흔하디흔한 보통 회사원들의 꿈인 이 회사의 이사가 되는 것, 강남 건물주가 되는 것, 자산가가 되는 것이라는 말보다는 훨씬 멋지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 남편은 이후에 그 기업의 이사가 되고 강남의 건물주가 되고 자산가가 되었지만, 소설가라는 꿈도 내가 보기엔 쉽게 이뤘다. 멋지다. 진짜 멋지다. 그는 뭐든 그렇게 쉬워보이게 척척 해치운다. 그리고 그의 처녀작인 “우리의 계절”은 이야기가 재밌고 희망적이다. 배꼽을 잡고 책을 읽었다. 이렇게 위트넘치는 책은 처음읽었다. 처녀작으로 베스트 셀러가 되진 않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집필을 끝마치고 그것을 출판해 줄 출판사로부터 제안을 받아 서점에서 판매되고있다는 것 자체가 멋있고 감사할 일이다. 기적이다. 나는 세상에서 마음을 먹고 “내가 한다면 한다.”를 해내는 사람을 진심으로 격려하고 대단하다고 본다. 누구는 시작도 못했는데, 내 남편은 회사를 다니며 부동산법을 공부하며 자산을 굴리며 아픈 아내의 발이 되어주며 소설을 출판했다. 지금 남편은 다음 소설을 집필 중인데, 고양이가 널부러져있는 책상앞에 앉아 큰 스케치북에 그려놓은 플롯을 보며 컴퓨터 모니터 두 개를 열어놓고 글을 쓰는 모습은 과히 나의 이상형이다. 이상형과 사는 여자의 인생은 행복 그 자체다.소설가가 꿈이었고, 현재는 소설가와 함께 사는 나는 지금은 몸이 아파서 잠깐 쉬는 중인데, 현재 내게 가장 큰 낙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원없이 소설책을 사모으고 원없이 소설을 읽고있다는 것이다. 힘겨운 삶을 살며 생계를 위해 글을 쓰다 돌아가신 클래식 소설가들은 그녀들의 자서전을 읽으며 그 세계관을 이해하고, 요즘 한창 활동하는 소설가들은 가끔 나오는 에세이로 그들이 어떤사람인지 배워간다. 편지 말고, 인류 최초의 장거리 소통이었던 책을 읽으면서 흐르는 시간은 세상 평온하고 재미있다. 책읽기는 외부적으로 아무런 방해를 받지않으며 내부적으로는 끈임없이 자극받는-에너지가 내적으로 향하는-내향적인 아이들(I, MBTI중)에겐 폭팔적인 에너지와 행복을 주는 행위이다. 나는 어릴때부터 책읽기와 글쓰기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한다. 아이들(I,MBTI중)에게 책은 내가 선택한 외부로의 통로를 터주는 지적, 경험적 학습이 되어준다.나는 시간도 없는데 대체 책을 왜 읽어야하냐?는 귀찮니즘이 섞인 다소 비난적인 학생들의 질문에 늘,경험의 면적과 직관의 날카로움을 길러주며, 뇌가 할 수있는 가장 수준높게 쓸모있는 학습이다. 책을 읽지않는건 생각없이 그저 먹고 싸고 자는 삶이다.라고 냉소적이며 강압적인 입장을 내세운다. 영어쌤이라고 독해와 문법을 정확하게 가르치는 것에만 만족할 수 소설가되는법 없다. 영미 문학을 소개하고 그 소설을 통해 작가가 바꾸려는 세상의 이미지와 목소리를 느끼지 못한다면 결국 그 아이들이 배우는 영어학습은 고작 시험과 SNS와 돈벌기를 위한 단순한 언어의 반복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이 얼마나 쓰레기같은 돈낭비 시간낭비인지...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반드시 문학과 글쓰기를 강요한다. 쓸모있는 인간 보다는 생각하고 만족하는 인간이 되길 바래서다. 쓸모있는 존재란 자기일 잘 하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않을 뿐이지만 생각하는 존재는 남에게 영감을주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세상은 소소하게 혹은 대단하게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 닿는 방향으로 달라지고 있다. 나에게 책은 시간을 만족스럽게 보내기 위한 수단이자 나를 보호하고 통찰력과 직관을 키우는 매체로 사용되지만 그 사이사이 때때로 남들에게 정리나 생각의 전환에 관한 자극을 주고있으니 나 또한 쓸모인간에 멈춘 것이 아닌 생각하는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고 그 쪽으로 나아가고 싶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를 세계관의 확장과 뇌의 자극을 위한 학습적 활동이라고 말한다면, 미국의 문학평론가인 마이클 실버블랫은 예술가의 서재(2019)라는 책에서 책을 읽다보면, 책안에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해요. 나 자신에 대한 질문 그리고 세상에 대한 질문 말이죠. 저는 답을 찾기 위해서 책을 읽어요.라는 심오한 의견을 말했다. 당연히 어떠한 질문을 갖고 답을 찾기 위해 책 속을 헤메진 않겠지만 현재 관심사의 책을 읽다보면 내가 가지고 있던 수 많은 질문의 해답을 이제야 찾은 듯한 느낌이 든다. 해답을 먼저 찾고 질문에 대해 생각을 해보는 진귀한 시간을 갖게 된달까. 내게 가끔 사람들은 고민을 토로한다. 사람과 갈등이 있거나 일이 안풀려 스트레스가 많다는 사람에게 나는 무조건 청소를 하라고 한다. 피부 트러블이든 인간관계 트러블이든 표면상 정리하지 않아 생기는 문제가 많다. 이 때 집안을 싹 치우고나면 공간이 깔끔해지고 그 공간안에서 휴식을 취한 후 해답이 문득 떠오르기 나름이다. 혹은 딥클린징 청소를 하다하다 깨끗해진 집을 보고 스트레스가 풀리게 되고 도대체 뭐가 우선순위인지 깨달음이 생긴다. 길을 잃거나 의욕이 없어서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사람에게는 두 개의 조언을 한꺼번에 한다. 집에서 책을 읽고 밖에 나가서 아르바이트를 해라. 이러면 내면과 시간과 지갑에 꽉꽉 차면서 길이 보이고 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 책은 마찬가지로 내 스스로가 어려웠을 때 가장 힘이 된 존재였다. 내 인생이 롤러코스트정도는 아니어도 12년에 한 번씩은 큰 소용돌이에 빠졌다나오는 호러영화과인데, 그때마다 내가 붕붕 뜨지 않고 땅에 뿌리를 내리려하고 기분을 가라앉히고 견뎌내는 연습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은 책 읽기와 일기쓰기이다. 책을 읽으며 배웠고, 일기를 쓰며 확장했다. 책을 읽으며 내면의 소용돌이를 소설가되는법 일으켰고, 일기를 쓰면서 내면 깊은 곳으로 다이브를 해 그 소용돌이가 잠잠해 질때까지 내 자신과 함께 있어주었다. 나는 내가 모르던 나와 현재 내 정신, 이렇게 둘이 있는데, 이 둘이 만나면 문제가 해결된다. 쉬운말로 문제가 아니라 나를 직면하고 바라보면 살기 쉬워진단 말이다. 소설가들의 삶에 대해 스토리를 찾게 된 건 우연같은 필연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는 반 고흐인데 그 이유는 그의 처함한 스토리가 가장 맘에 들었기 때문이고 그것이 그의 작품에 고대로 녹아있기때문이다. 그렇기에 소공녀와 비밀의 정원을 쓴 프랑시스 혹슨 버넷의 평생 가족과 남편에게 빨때꽂임을 당하는 인생속에서 그 두 작품을 썼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슬펐고 그녀의 책들을 어루만졌다. 왜 매 책마다 어릴 때 유복했고 버릇없고 하녀같은 삶을 살다 끝에 구원자가 생겨나 희망의 메세지를 쓰는지 알것 같았다. 두 책은 마지막에 희망의 구원자가 나타나는 것만 빼고 그녀의 인생과 똑같다. 지겹지만 손을 책에서 놓을 수 없는 어릴 때부터의 최애작은 작은 아씨들을 쓴 루이자 메이 올컷이 왜 두 동생을 등장시켜 한 명에게는 늘 천사같고 또 다른 한 명에게는 악마같았는지 궁금했었다. 작은 아씨들의 조는 루이자 메이 알콧 본인을 고대로 옮겨 놓은 캐랙터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여동생이 너무 싫었으며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것에 인생을 다 썼는데, 아버지는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돌아가셨다. 목사이자 교수였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천국에 대한 아이디어에 회의적이었는지 갑자기 죽는게 두렵다며 루이자에게 함께 죽어달라고 부탁을 하고 그녀는 실제로 삼일뒤 아버지를 따라 죽기위해 자살을 하고 성공해버린다. 그녀의 소설에서 계속 연재되었던 조의 행복한 삶은 그녀의 삶에 없다. 또 한명, 빨간머리앤의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고아인 앤에게 인간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삶을 만들어주는 동안, 자신은 남편의 폭력과 사랑하는 아들이 동물을 학대하고 죽이기 시작해 결국엔 동네 여자아이들을 데려다 학대하고 죽이는 악마가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돌봐야했다. 남자들의 난폭성과 무식함에 질린 그녀가 그녀의 소설속 빨간머리 앤의 남성인물들을 왜 다들 그렇게 존재감없고 착한 심성의 소유자로 썼는지 알 것같다. 남편과 아들과 대조적인 평온한 남성상을 쓰고 있으면 그녀는 스스로 잠시 괜찮았을 것이다. 피트 제럴드는 자기 소설과 똑같이 살다가 똑같은 방법으로 자살했다.반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자신의 삶을 모두 테오에게 쓴 편지에, 위에 언급된 여성소설가들은 자신의 일기장에 모든 이야기를 써 놓았다고 한다. 어찌보면 그들의 글쓰기는 살아가기 위한 발버둥이었고 능력없는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생계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인생의 스토리와 함께 작품을 남겼다. 그렇게 힘든 마음이 소설의 거름이 되었다는 것이 안타까우며 동시에 경이롭다.나는 소설의 스토리를 읽는 사람이 아니다. 스토리보다는 소설가되는법 묘사와 대화로 엉켜있는 그 문장들의 흐름속에 빠지는 것이 좋다. 그렇기에 아는 내용이어도 읽고, 한 번 읽은 책은 반드시 다시 돌아가 읽는 습관이 생겼다. 소설은 소설책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책으로 나오기까지의 단계를 아는 것도 멋진 일이다.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의 실비아 비치 휘트먼은 실제의 책의 내용보다 그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알아가는 것이 더 재미있어요.라고 했다. 나는 요즘 에쿠니 가오리의 명작들을 다시 읽으며 그녀가 썼던 에세이를 함께 읽곤 한다. 요즘 작가들은 앞에 언급한 1800년대의 여성 작가들보다 훨씬 편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지만, 어쨌든 한 시대가 주는 어려움과 작가라는 직업이 주는 경제적불안과 심리적 갈등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자신의 심리와 철학적 메세지를 녹아들게한 스토리를 쓰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을 내주니 내겐 정말 고마운 일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에세이를 읽으며, 또 내가 좋아하는 한국의 소설가 한은형작가의 에세이 두권을 읽으며 강한 떨림을 느꼈다. 나와 비슷한 점들이 많다. 아주 많다. 결국 책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은 공존하며 서로가 없이는 살지 못하는 파트너 관계이다. 그래서인가? 비슷하다. 예민하고 예리하고 심리적이고 의외로 감성적이기보다는 효율을 따지고 셋이 있는거 보다는 둘이좋고, 둘이 있는거 보다는 혼자가 좋고, 고양이를 꼭 키우며 음식에 관심이 있고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하다. 몸에 걸치는 페브릭의 촉감에 민감하고 내가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을 바라보는 에너지소모도 싫어서 눈길도 주지 않는다. 한 번 뭔가에 빠지면 지하동굴 바닦까지 쳐야하며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짝 웃으며 동굴에서 나온다. 그리고 쓰고자 하고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참 많은데 뭔가 하나를 숨기고 있어서 까도까도 계속 궁금하다. 소설가를 향한 나의 마음은, 진심은 이렇다. 이렇게 길게 써도 모자랄 정도로 존경과 애정과 동경을 갖고 있다.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어릴 적의 꿈을 이루지 않았다. 아직 이루지 않았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왠지 40대에도 꿈이 있다면 멋져보여서) 평생 이루지 않을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이젠 텄다. 나는 언제나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이 최고야! 이거보다 더 멋진 책은 없어!라며 매번 다른 한 권에 감탄하며 산다. 그런 사람이 어찌 그들보다 더 멋진 이야기를 쓸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아니야, 할 수 있어! 꼭 꿈을 이루기바래!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그 꿈을 이룬 남편을 보며 참 장하구나, 나는 안했는데 이 사람은 해냈네.라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참 뿌듯하다. 나는 이런 재능을 갖고 이런 열정을 갖고 귀찮다는 맘과 잘 안되겠지라는 두려움으로 자포자기를 하여 소설가는 되지 않았지만 계속하여 진화하는 독자는 될 것이다. 독자도 소설가만큼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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